|
[50주년 특별기획] 생명과 기쁨을 나누는 소아 환자들의 슈바이처
|
||
|
어른이고 아이고 병원에 오는 모든 환자를 똑같은 방법으로 검사하고 치료하던 1970년대. 정풍만 교수는 소아에게 맞는 진료법을 도입해 우리나라에 소아외과를 처음 만든 인물이다. 천민난만한 아이들의 눈앞에서 어떻게든 치료해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대한민국 소아외과의 역사를 일궈온 정풍만 명예교수를 만났다. 한양대학교병원 개원 50주년 특별기획
|
|
1974 ~ 2009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1977 ~ 1979 영국 셰필드대 아동병원 소아외과 연수 1980 ~ 2009 한양대학교의료원 소아외과 과장 1983 ~ 1988 한양대학교의료원 기획실장 1988 ~ 1997 한양대학교의료원 부원장 1997 ~ 2001 한양대학교의료원 외과 주임교수 1998 ~ 2002 대한외과학회 보험, 고시이사 2002 ~ 2004 대한외과학회 이사장 1984 대한소아외과 창립 |
1993 ~ 1995 대한소아외과 학회장 1995 ~ 2000 대한 소아외과 학회지 「소아외과」 창간 편집위원장 2001 ~ 2003 한양대학교 교수협의회 부회장 2003 ~ 2006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장 2004 ~ 2006 대한의과대학학장협의회 회장 2007 대한민국 의학 한림원 정회원 2010 후즈후 세계인명사전 등재 2016 대한외과학회 자문위원 |
수재 중의 수재, 배움의 길을 달리다
대한민국 소아외과 창시자로 알려진 정풍만 명예교수는 1967년 서울대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의사 국가고시에서도 전국 최고 성적으로 합격한 수재다. 충북의료원에서 군 대체복무를 하던 그는 한양대학교 설립자 김연준 이사장의 부름을 받고 한양대학교병원에 근무하게 된다. 그는 쉴 새 없이 몰려드는 교통사고 환자를 보며 외과 전문의로서의 기본기를 다졌다.
2년여 간 외과 생활을 하며 더이상 새롭게 배울 것이 없다 여겨질 즈음, 정 교수의 귀에 영국문화원의 장학생 모집 소식이 들려왔다. 당시 영국은 세계최초의 소아병원을 기반으로 소아외과 분야의 활발한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단 한 명 모집했던 장학생 자리에 선발된 그는 새로운 분야에 대한 기대를 안고 비행기에 올라탔다.

소아외과, 어른이 아닌 어린이의 기준을 만들다
영국 셰필드대 아동병원, Alder Hey 아동병원 및 Great Ormond Street 아동병원에서 연수를 마친 정 교수는 1979년 한양대학교병원으로 돌아온다. 선진 의료기술을 배워온 그는 곧바로 소아외과 환자를 독립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모든 병원의 시스템과 시설이 어른 기준으로 되어 있던 1970년대, 어른 못지않게 쏟아지는 소아 환자에 맞는 의료 체계가 절실했다.
“하물며 피검사 장비조차 아이에게 맞는 것이 없었어요. 체중 1.5kg 아이 몸 안에 피가 100cc인데 한 번 검사할 때마다 20cc씩 피를 뽑으면 되겠나요. 또 아이들은 어른에 비해 신체 변화가 아주 급격하기 때문에 의료진 또한 아이에게 맞는 사람이어야 해요. 잠깐 한 눈 팔았다가는 처치 시기를 놓치기 일쑤니까요.”
정 교수의 노력으로 개설된 소아외과는 1980년 4명의 간호사와 8인용 병실 1개로 시작하여, 1981년 5월부터는 본관 11층에 20병상 전용 병실에 9명의 간호사가 배치됐다. 이때부터 2009년 퇴임 시까지 정 교수는 소아외과의 유일한 전문의로 수없이 많은 아이들을 진료했다.
샴쌍둥이 분리 수술, 다양한 성공 사례를 남기다
오늘날 당연하게 여겨지는 산전검사가 없던 7~80년대, 출산율 또한 높아 선천적 기형으로 병원에 찾아오는 환자가 많았다. 이 시기 정 교수는 다양한 케이스를 치료, 연구하며 소아외과 분야의 역사를 발전시켜갔다. 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바로 샴쌍둥이 분리 수술이다.
신체 일부가 붙어서 태어나는 샴쌍둥이는 신생아 5만~10만명 당 1명꼴로 탄생하고 대부분 태어나는 즉시 사망한다. 처음 정 교수를 찾은 환자는 가슴과 배가 30cm 가량 붙어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 남자아이 둘이었다. 무사히 수술을 마친 아이들은 건장한 청년이 되어 아직까지 잘 지내고 있다고.

후배들을 위한 길을 만들다
정 교수는 병원의 체계를 만드는 데에도 힘썼다. 특히 그가 한양대학교병원의 주요 보직을 맡으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교수들이 공부할 수 있는 교수실을 만들어주는 일이었다. 입버릇처럼 공부하라는 말을 달고 다녔던 그는 후배 교수들이 해외에서 선진 의료기술을 배워오기를 바랐다.
의료 서비스의 수준은 국민 생명과 직결 되어 있는 일인만큼,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는 판단 아래 그는 교수 해외연수를 위한 기반 마련에 돌입했다. New Castle upon Tyne 의과대학과 자매결연을 맺어 교수 교환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한양대학교 의과대학을 영국의학협회(general medical council)에 등재시키기도 했다. 이후 해외연수 프로그램이 정착되면서 더 많은 교수 들이 경제적 걱정을 덜고 한결 나은 환경에서 의술을 배워올 수 있었다.
“지금은 누구나 외국에 나갈 수 있지만 옛날엔 아니었어요. 아무나 나갈 수 없었죠. 그런 때에 제가 영국문화원장학생 신분으로 영국에 가면서 딱 200불을 들고 갔어요. 선진 의료기술을 배오겠다는 생각으로 버텼지만, 경제적으로 힘들었죠. 당시의 제 경험을 바탕으로 교수 해외연수 프로그램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우리 병원을 넘어서 우리나라 의료계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책임감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한양대학교병원의 기획실장, 부원장을 맡으며 김연준 이사장과 각종 규정을 제정하며 오늘날의 체계를 완성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운영의 기반을 닦아놓은 그의 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어 1994년에는 장폐색으로 소화흡수를 하지 못하는 단장증후군에 걸린 신생아의 장 길이를 두 배로 늘리는 수술을 국내 최초로 시도해 성공하기도 했다. 정성을 들여 치료한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살아가는 모습이 그렇게 고맙고 애틋하다고. 아직도 그의 양평 자택에는 종종 옛 환자들이 찾아온다.
-
- 이전글
- 단 한 순간의 만남을 위해
- 2022-07-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