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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명을 배려와 헤아림의 사랑으로 대하다, 윤여경 한양대학교 간호학과 동문회장
병실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드나드는 것부터가 환자를 헤아리고 배려하는 삶이라고 여기는 윤여경(60) 씨는 벌써 두 번째 연임된 한양대학교 간호학과 동문회장이다. 한양대학교 간호학과 졸업, 한양대학교병원 간호과장으로 퇴임하기까지, 그리고 아내와 엄마로 살아오는 동안 내주기만 했던 사랑이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더라는 깨달음을 후배들에게도 전하고 싶다. 그걸 알고 나니 인생이 좀 더 깊어진 듯하다. 따뜻하게 살아있는 집, 그리고 주인장 집은 사람을 반영한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이 집의 주인장은 분명 사랑이 차고 넘치리라. 따뜻함은 물론이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어우러져 흐르는 곳에 자리한 집 앞 너른 공터, 사람보다 먼저 반기는 것은 버려진 고양이들이다. 주인장이 마음 놓고 들고나라고 만든 집만 셋 채다. 예닐곱 마리의 고양이들은 주인장이 제 때 챙겨주는 먹이로 길 위의 삶을 청산하고 새끼까지 낳았다. 이제 막 어른 주먹 크기를 벗어난 새끼 고양이 ‘쿠키’의 첫 번째 겨울나기가 걱정된 주인장은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여다보기를 반복한다. 참으로 세월을 곱게 먹는 윤여경 씨다. 낯선 손님을 맞는 표정이 보드라운 풀밭 같다. 익살스러운 눈사람이 서 있는 작고 낮은 대문을 들어서니 여러 마리의 개들 소리가 들린다. 개들 또한 아픈 과거를 지닌 유기견이다. 주인장의 끊임없는 사랑에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개들과의 소통은, 그래서 누구나 수월하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를 귀히 여기며 살아가는 윤여경 씨의 집은 주인장의 인생관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듯하다. 미국에서 자식들 뒷바라지 할 때 큰 위안이 되어 준 개 럭키의 무덤이 한쪽 구석에 자리하고, 어려운 고비 때마다 의지가 되어 준 성모마리아의 목에는 목도리가 온기 있게 둘러져 있다. 집 밖 풍경이 이러하니 집 안 풍경의 온도는 말할 것도 없으리라. 여러 개의 방으로 나뉘었을 법한 공간은 복층 구조로 훤하게 트여 있다. 어디 한 곳 막힘이 없다. 그리고 천정과 사방으로 난 큰 통 유리 창과 작은 창으로 자연이 들어와 있다. 차경(借景)인 셈이다. 꽃 피는 계절 이 집에서 자식들의 혼례도 치렀다. 그러면서 집은 많은 추억과 이야기를 지니게 되었다. “더 비우고 낮아져야 해요” 양평에 위치한 이 집으로 이사 오기 전까지 윤여경씨의 삶은 느긋하지 못했다. 한양대학교 간호학과를 졸업한 뒤 한양대학교병원에서 수십 년 간 간호사로 일해 왔고, 그 사이 결혼해 야무지게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를 했다. 그리고 얼마 동안 자식의 교육을 위해 미국 살이를 했는데, 지금 그 자식들이 잘 자라 의사인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수간호사 시절이 가장 행복했었다는 윤여경 씨는 변화의 힘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불러오는 지를 그때 알았다. 그리고 그 시절 누구보다 따뜻한 간호사였다. ‘진심으로 정성을 다하면 통한다’는 단순 명료한 진리를 매우 소중히 여긴 까닭에 환자와 동료 모두로부터의 신임도 두터웠다. 그것이 바탕이 된 것일까. ‘한양대학교 간호학과 동문회장’을 맡고 있는 윤여경 씨는 두 번이나 연임을 하며 아름다운 나눔도 실천하고 있다. 기부로 나눔의 손길에 동참했고, ‘발전 후원 바자회’ 를 통해 뜻 깊은 학교발전 기금도 마련해 전달했으며, 한양대학교구리병원에 그랜드피아노를 놓아주기도 했다. 또 장학회 기금도 긍정적이고 융통성 있게 운영하고 있다. 아직도 공부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윤여경 씨는 지금 박사논문을 준비 중이다. ‘노인간호학’을 연구하기 위해 그 동안 꾸준한 노력을 해왔는데 이제 좀 구체적으로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회가 된다면 교도소의 젊은 친구들과도 만나 넘치는 사랑을 전하고 싶다. 윤여경 씨의 이와 같은 삶은 후배들에게도 귀감이다.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며 또 다른 꿈을 꾸고 실천해가는 선배에게 후배들은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닫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윤여경 씨는 민망한 듯 이렇게 말한다. “더 비우고 낮아져야 해요” 라고. 글.손미경(자유기고가)·사진.김선재 [인생예찬] 한양대학교의료원의 임직원이 만들어가는 ‘의미’있고 ‘흥미로운 삶’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2011-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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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기쁨이 가득했던 '내 인생의 학교' 김대근 전 기사장 한양대학교병원 진단검사의학과
순수했던 학창시절, 누구나 직업에 대한 꿈을 키운다. 그도 그럴 것이 직업은‘자아실현의 과정’이며 직장은 ‘자아실현의 장’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그 설레는 직업관은 희미해지기 십상이다. 관성적으로 일을 하다보면 직업에 대한 생각에도 굳은살이 생기기 때문이다.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 청년같은 인상의 노신사는 자신의 일생에서 직장은 학교였으며 일은 배움의 기쁨이었다고 했다. 그의 학교는 한양대학교병원이었고 배움의 기쁨은 임상병리학이었다. 그는 김대근 진단검사의학과 전 기사장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찼던 내 직장 “1972년 5월 3일은 지금도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발령을 받은 병원 직원들과 내빈, 축하객 모두가 한양대학교병원 현관 앞에서 열린 개원식에 참석했었지요.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시설로 주목받은 한양대학교병원의 풍광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어요. 의료진도 당대의 최고 실력가들로 구성되었지요. ‘아, 이곳이 내 직장이구나!’하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2005년 2월 정년퇴임하기까지 한양대학교병원에서 보낸 34년은 날마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과정의 연속이었습니다. 한양대학교병원은 내 일생에서 가장 크고 빛나는 학교였어요.” 김 전 기사장은 임상병리학을 전공하고 한양대학교병원에서 임상병리사로 재직했다. 출범 당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의료진, 최신시설과 장비를 갖추었던 한양대학교병원은 환자들이 진료 받고 싶어 하는 병원으로 정평이 높았고 VIP 환자들이 줄을 이어 찾았다고 한다. 잠시 병원의 풍경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이 느껴지는 일터에서 그는 임상병리학 특히 미생물학, 면역 혈청학 분야의 검사전문가로 성장해갔다. 임상병리검사는 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데 꼭 필요한 분야이고 세포, 조직, 장기에 연관된 병의 원인과 변화, 임상적 영향 등에 관한 검사와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학문이다. 진단이 정확해야 치료가 잘 되고, 환자는 가능한 한 빠른 시간에 적절한 치료를 받음으로써 회복된다. 초기 진단에서부터 임상의사에게 검사자료를 제공하는 임상검사업무를 위해 그는 양립하기 힘든 정확성과 신속성의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특유의 섬세함과 성실성을 발휘하며 노력했다. “70~80년대 초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장기이식수술이 소수의 병원에서만 시행되었지요.우리 병원도 장기이식 수술을 위한 조직을 가동하고 팀원과 부서의 역할, 운영 등을 분담하게 되고 업무수행을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우리 임상병리과에서는 필요한 모든 검사는 가능한데 조직적합검사가 실행되기 전이었어요. 병원의 배려로 1980년7월에 일본 이식면역학의 명문인 동해대학에 파견되어 3개월간 그곳 이식면역센터에서 HLA-ology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장기이식에 필요한 각종 검사종목을 실시할 수 있도록 연수하고 귀국했습니다. 세포면역 검사실을 신설하여 우리병원에서도 장기이식의 시대를 맞게 되고 신장이식부터 시행하는데 동참하며 큰 보람을 갖게 되었습니다.” 故 박승함 교수는 그에게 잊혀지지 않는 은사 같은 분이었다고 한다. “1982년, 임상병리과 과장님이셨던 故 박승함 교수님께서 미생물 검사실의 도약이 되는 비전을 계획하시던 일이 있었습니다. 특히 소아과 환자들의 설사증과 질환들에 대해 미생물학적 검사를 잘 하셔서 그 원인 미생물을 정확히 밝혀 연구를 하시고자 한 것이지요. 그 분야에 많은 업적을 낸 일본 동북대학병원 소아과 연구실로 제1차 연구분야인 로타바이러스에 대해 공부해 오도록 저와 전공의 선생님을 파견하셨지요. 보사부차관을 역임하셨고 국립의료원에서도 근무하신 권위 있는 임상미생물학자이셨던 교수님의 지도에 힘입어 귀국 후 바로 검사를 실시하고 결과를 임상진료부서에 통보하고 연구 결과물이 나오기 시작했고 국내에도 로타바이러스로 인한 설사가 많음이 밝혀졌죠. 허나 애석하게도 그 해 12월, 교수님께서 병환으로 타계하셨습니다. 기본적인 검사는 이후 계속 시행하였으나 전자현미경에 의한 검사나 특수검사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지금도 죄송스러운 생각에 하늘을 쳐다보며 상념에 잠길 때도 있습니다.” 배우고 또 가르치며 느끼는 학문의 즐거움 “한양대학교병원에 근무한 34년 동안 초기 진단검사의학분야가 개원에서부터 눈부시게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던 점을 참으로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후배들이 한양대학교병원 직원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앞으로도 많은 성과를 내주길 바랍니다.” 김 전 기사장의 배움의 열정은 늘 뜨거웠다. 시간을 쪼개 서울대보건대학원에서 보건학 석사학위도 받고 관련분야인 대한미생물검사학회에서 논문도 발표하며 학회장도 맡아서 했다. 지원을 아끼지 않은 병원과 의료진들의 성원에 보답하려는 마음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성실함의 대명사였던 그의 모습은 후배들에게 좋은 자양분이 되었을 터이다. 자신의 일에 열정적인 모습은 자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한양대학교병원에서 태어난 슬하의 1남1녀는 모두 아버지의 추천으로 한양대학교와 대학원에서 공부를 했고 공업화학을 전공한 아들은 미국 케이스웨스턴리저브(CWR)대학에서 박사학위(화학)를 받고 지금은 퍼듀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정년퇴임은 했지만 김 전 기사장은 배움의 자세를 잊지 않고 있다.2005년부터 성균관대 유학대학원에서 동양고전을 공부하는 한편, 사진을 배워 수목원과 식물원을 다니며 촬영에 몰두하고 있다. 배운 것을 나누는 일에도 열심이다. 고려대보건과학대학에서 기사장 직무 전에, 퇴임 후에는 신흥대학에 출강하여 미생물학과 면역학 강의를 했다면서 가르치는 것은 배우는 것임 을 강조했다. 논어의 첫귀절,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을 가슴으로 체득했다고 한다. 글/박현숙 자유기고가 사진/김선재 [인생예찬] 한양대학교의료원의 임직원이 만들어가는 ‘의미’있고 ‘흥미로운’ 삶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2011-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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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동행
서울 개포동에 위치한 하상 장애인 복지관. 이곳에서는 한 달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시각장애인들과 함께 나들이하는 모임이 있습니다.‘아름다운 동행’은 한양대학교병원 성형외과 안희창 교수님이 주체가 되고 그밖에 많은 선생님이 이 봉사활동에 참여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생소함과 막막함으로 시작했던 첫 ‘아름다운 동행’과는 달리 세 번째 참여는 큰 의욕과 자신감으로 편안한 마음으로 봉사활동에 임할 수 있었습니다. 2010년 가을 그날도 저는 아침 일찍 서둘러 병원 앞에서 선생님들과 만나 복지관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다른 자원 봉사자들과 90여 명의 시각장애인을 만났고, 드디어 우리의 목적지인 가평 ‘아침고요수목원’ 으로 향했습니다. 수목원에 도착한 우리는 소나무, 잣나무, 그리고 여러 꽃잎들의 촉감, 생김새, 색깔 등 수목원 주변 환경에 대해서 시각장애인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것들에 비유를 해가며 세세하게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 그리고 수목원 주변을 둘러보곤 할 때 계단이나 돌 뿌리 같은 위험요소들도 있어 그들이 다치지 않게 최대한 안전하게 둘러볼 수 있도록 지팡이 역할도 해드렸습니다. 점심식사 후 자유시간도 주워졌는데 수목원 산책 때와는 또 다른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MP3를 들고 다니며 노래를 듣는 분, 또 흥얼흥얼 거리며 너무나 행복한 표정을 짓고 노래를 부르시는 분, 그리고 여럿이 모여 함께 노래를 부르며 박수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너무 순수하고 해맑아 보였습니다. 이런 꾸밈없는 그들의 진실된 모습이야말로 너무 행복하고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병원에서 일하면서 돌봐 드렸던 환자들이 완쾌되어 퇴원하는 모습을 볼 땐 굉장히 뿌듯하고 값진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제 자신이 으쓱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느끼는 보람과는 다르게 ‘아름다운 동행’은 또 다른 신선함을 안겨주었습니다. 요즘처럼 이기주의와 물질 만능주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때에, 우리 주변에 어려운 이웃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선뜻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이고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저 역시 ‘아름다운 동행’을 하기 전까진 그랬지만, 이제는 조금 달라진 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동안 경험 해보지 못한 일들을 해 봄으로써 저도 다른 사람을 위해 무슨 일인가 했다는 성취감과 기회만 주어지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고, 더 이상 혼자가 아니며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인 것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삶에 대해 다시금, 진지하게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도 생겼고, 작은 일이지만 남을 기쁘게 할 수 있다는 것에서 가슴 뿌듯한 희열도 느꼈습니다. 이렇듯 제게 주어진 이 아름다운 동행은 제 자신과 개인과 개인, 그리고 사회 속에서 느껴왔던 벽을 소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내면적 자각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선물보다 더욱 소중하고 갚진 마음의 선물을 받게 된 것 같아 이런 기회를 만들어주신 안희창 교수님께도 정말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끝으로 봉사는 남을 위하는 마음과 돕겠다는 의지만 가지고 있으면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관심과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작게나마 그들의 친구, 가족이 되어주고 그들의 손, 발이 되어주는 것만으로 우리는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남을 위해 일한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 일수도 있지만 그 안에서 얻어지는 말할 수 없는 감동과 사랑을 느끼게 된다면 그것이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루 빨리 모든 사람들이 이런 봉사의 진정한 의미와 기쁨을 알게 되길 바라며, 저 또한 더 많은 기회들로 인해 감동이 쌓여 사랑이라는 거대한 울타리가 완성되어 가는 모습을 기대해 봅니다. 글/고미현 한양대학교병원 10층 병동 간호사 [사랑수첩] 오늘 실천한 사랑이 타인의 내일을 바꾸는 힘이 된다는 것을 믿는 한양대학교의료원 임직원들의 세상사는 이야기
2011-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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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로 간 공대생, 소화기 분야 새 길 연다 - 소화기내과 이항락 교수
“우리 병원이 지대가 좀 높잖아요(웃음). 강의실을 오가며 24시간 환히 불 켜진 병원 건물을 올려다보면서 그야말로 청운의 꿈을 품게 된 것 같아요.”설령 꿈을 이루기까지의 과정이 멀고 험난할지라도, 한 번 사는 인생, 기왕이면 남들에게 도움을 주며 존경 받는 삶을 살고 싶었다는 말에 힘이 실린다. 치료법 개발의 초석을 마련하고 국민 건강 증진에 기여하는 기초연구의 산실로 한양대학교병원이 우뚝 서는 날까지 멈추지 않고 정진하는 것이 모교를 지키는 교수로서 자신이 해야 할 당연한 임무라고 했다. 그러니 이 남자라면 믿고 따라도 좋다. 이항락 교수의 연구는 숨을 쉬고 밥을 먹는 일상처럼 꾸준히 진행된다. 속 편하게 만드는 치료를 위한 임상시험은 물론이고, 관련 연구를 책으로 출간해 치료법을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해왔다. 최근 3년 동안 20여편의 논문을 써낸 그다. 관련 질환 치료에 있어 누구보다 무기가 많은 셈이다. 지난 겨울에는 대한소화기내시경학회 ESD연구회 회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장기별 치료 요령, 병리 판독, 치료 후 경과, 시술기구 사용법, 관련 약제 사용 등 ESD의 모든 것을 총망라한 의학서적 《소화관종양 내시경 치료술의 실제》를 출판했다. 그뿐인가. 대한소화기학회, 대한소화기내시경학회, 대한장연구학회, 대한소화관운동학회, 대한내과학회, 대한소화관운동학회 학술위원,대한상부위장관학회 전산정보위원, 대한소화기내시경학회 학술간사 등을 맡아 꽉 찬 하루하루를 살며 연구실 불을 밝히는 참이다. 늦깎이, 그래서 더 견고한 시간 겸손이 도를 지나친 사람이다. 이런 데 이름을 올리기에 자신은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라며 난처한 표정으로 취재진을 한참이나 벌 세운 이항락 교수는 지켜야 할 원칙은 하늘이 두 쪽 나도 행동에 옮기는 성격 탓에 마흔둘 나이에도 지인들에게서 잔소리 꽤나 들으며 산다. 공인된 에너자이저이기도 하다. 거절하는 법을 잘 몰라 하나 둘 떠맡게 된 번거로운 일들도 한 치의 오차 없이 완수해내는 덕분에 생긴 별명이다. 무식해 보인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월등하던 체력도 나이를 먹어가며 서서히 평준화되고 있는 것 같아 자못 걱정된다는 너스레에 미소가 고였다. 그 답답한 의사를 찾아, 전국을 넘어 세계 각지에서 환자들이 몰린다. “헝가리에서 의대에 다니던 20대 초반의 남자 환자가 위암 초기에 저를 찾아왔어요. 내시경을 통해 무사히 암세포를 절제해 건강을 되찾았는데, 수술 전에 이 친구의 아버지가 꼬깃꼬깃한 편지 하나를 제게 건네더군요. 투박한 손 글씨로 꾹꾹 눌러쓴 장문의 편지 안에는 ‘부인과 사별하고 홀로 어렵게 키워 의대에까지 보내놓은 소중한 아들인데, 이렇게 잃을 수는 없습니다. 선생님만 믿습니다’라는 말이 적혀 있었지요.” 믿고 찾아와 생명을 맡기는 환자들에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365일 비슷한 풍경 같지만 어느 하나 같지 않은 숭고한 일상 속에 그저 온 힘을 다하는 일일 뿐이다. ‘속 편한 세상’만든다 좋은 병원에는 우선 명의가 있어야 하겠다. 그 뒤에 믿을 수 있는 첨단장비까지 갖춰져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것이다. 세상의 많고 많은 소화기내과와 비교하면 섭섭하다. 각 분야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는 한양대학교병원 소화기내과 의료진의 협진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다. 한양대학교병원 소화기내과에는 실력파 의료진이 각종 첨단기기를 기반으로 전문적인 치료와 시술로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위장관 출혈 치료, 종양 절제, 식도·위 확장술, 담도 결석 제거술, 담도배액술 등 내시경을 이용해 수술하지 않고도 치료가 가능하게 되면서 최근 소화기내과의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 소화와 흡수를 담당하는 장기에 발생하는 모든 질환을 관할하다 보니 할 일은 끝도 없다. 한양대학교병원 소화기내과는 98년 소화기병연구소를 설립해 진단 및 분자 생물학적, 생화학적 연구와 역학 조사 및 소화기 질환의 통계·계몽 사업과 학술 교류 활동을 펼치며 소화기학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물론 손도 쓰기 전에 갈 데까지 가버리는 야속한 질환도 있다. 발견될 당시 다른 장기로 전이되는 등 전신질환을 동반하는 경우도 많고, 무엇보다 증상이 뒤늦게 나타나 수술 시기를 놓치는 환자도 많다. 소화기내과는 특히 사람 목숨 왔다갔다하는 곳이다. 최선을 다해 치료해도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곳이 병원일 터. 혹독하고도 긴 시간들을 버틸 수 있게 한 원동력은 이곳에 그가 찾던 바로 그 ‘존엄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양대학교병원 이름값’ 한다는 칭찬을 들을 때마다 일할 맛 난다는 그는 더 넓은 시야로 미래를 준비하며 대한민국 소화기학을 발전시키는 주춧돌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글/윤진아 사진/김선재
2010-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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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커다란 나무, 방사선종양학과에서 근무하며
img class="right"한가위 보름달이 기울면서 아침, 저녁으로 서늘한 기온이 느껴집니다. 저는 한양대학교병원 방사선종양학과에서 근무해온 지 20여 년이 되어갑니다. 서울 강동구 둔촌동에서 농사를 지으시는 조부모님과 부모님 아래 대가족 속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자라났습니다. 대가족의 막내로 태어난 덕분에 할아버지,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조부모님께 받은 사랑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며 배려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한 것 같습니다. 저의 고향인 강동구 둔촌동은 그 당시에는 평범한 농촌마을 이었습니다. 천호동 약수터라고 불리는 유명한 약수가 나오는 곳이었고 초등학교 시절에는 단골로 김밥에 사이다를 넣은 가방을 메고 소풍을 가던 아련한 추억이 배어 있는 곳입니다. 고교야구로 이름을 날리던 동대문상고에 진학하여 화이트칼라의 로망이었던 은행원이나 대기업에 입사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던 중 학교 내 소모임 MRA라는 봉사단체에 가입하여 양로원과 어린이시설 방문 등의 활동을 하면서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한 활동이 또 다른 의미 있는 일임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무척이나 저를 아껴주시던 할머니께서 췌장암으로 투병하시던 중, 방사선치료를 받게 되면서 처음으로 치료방사선과를 접하게 되었고, 방사선으로 영상만 찍는 것이 아닌, 직접 치료를 할 수 있다는 신기함에, 고교 졸업 후 방사선사의 꿈을 키우며 방사선과로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학생실습과정으로 한양대학교병원에 발을 딛게 된 인연으로 방사선종양학과에 입사하여 지금까지 근무해 오고 있습니다. 제가 근무하고 있는 방사선 종양학과는 주로 암 환자들을 치료하는 곳으로 환자분들의 심신이 매우 지쳐 계신 분들이 많습니다. 병원에 입원하여 여러 가지 검사를 하고 수술과 항암치료 후에 방사선치료를 받기 위해 방사선종양학과를 접하게 됩니다. 항상 환자들을 대할 때마다 할머니 생각을 하면서, 환자분들의 아프신 몸과 마음을 위로해 드리고, 저의 투박한 손이지만 격려의 마음으로 지친 손 한 번 더 잡아드리고,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전해 드리겠다는 자세로 치료에 임하고 있습니다. 때론 제가 맡은 일에 한계를 느낄 때도 있습니다. 저도 결혼하여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를 키우고 있지만, 제 아이들 또래의 어린 환아를 치료하거나, 임산부의 몸으로 태아를 위해 모든 치료를 거부하시다 출산 후에 치료받기 위해 오신 환자분을 볼 때면 애잔한 모성애에 고개가 숙여지기도 합니다. 오랜 시간 img class="right"투병으로 반복되는 항암치료와 전이, 재발의 고통에 지쳐서 괴로워하는 환자분을 치료할 때면 저의 마음도 무겁고, 무엇을 도와드려야 할지 막막할 때, 직업에 대한 회의가 들 때도 있습니다. 요즘은 방사선치료 기술도 많이 발전하여 예전보다 힘들어 하시는 분들도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방사선종양학 분야는 눈부시게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정상 세포조직에는 최소한의 방사선을 주고 종양세포에는 가능한 많은 양의 방사선을 줄 수 있는 여러 가지 치료방법을 도입하여 완치율을 높이고 있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방사선종양학과는 동료들과 함께 환자분들을 편안하게 치료해 드리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방사선사의 길을 선택했던 그 마음을 잊지 않고, 암환자의 치료를 위해 정성을 다하고자 하며, 언제나 밝고 친절한 모습으로 환자분들을 맞이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글/ 윤중천 한양대학교병원 방사선종양학과
2010-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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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을 든 문학의사 이방헌 명예교수
이방헌 명예교수(한양대학교 의과대학 내과학교실) 바라보고 이해하며 보듬으며 화려한 경력을 가진 의사생활을 하면서 피천득을 비롯한 수필대가들이 받은 ‘현대수필 문학상’을 수상할 정도로 성공적인 작품활동까지 할 수 있냐는 질문에 돌아온 대답이다. 모든 일에는 하고자 하는 마음과 열정이 계기가 된다며 환자를 돌보는 따뜻한 마음인 의사의 소양을 문학에서 찾는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얻은 감동을 끊임없이 메모하고 생각하는데 이는 의사의 의무이자 책임인 학문 연구 자세와 이어진다고. 늘 냉철하고 신속한 판단으로 환자를 치료해야 하는 의사이지만 그 기본은 환자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이라며 믿어왔다. 환자의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 보듬고 치유해야 진짜 의사라고 말할 수 있다. 30, 한양대학교병원과의 인연 1973년은 이방헌 교수가 처음으로 한양대학교병원에 발을 들인 해이다. 레지던트 1년 차인 30세에 근무를 시작하여 이정균, 김종설, 박경남 교수님들이 이끌어 준 덕분에 심장내과 전문의로의 길이 시작되었다고 그때를 회상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진료와 연구를 하다 미국유학까지 다녀와 활발한 활동을 하다 보니 30년이 지나 두 번째 서른, 60을 맞이한 곳도 한양대학교병원이었다. 대한고혈압학회 초대 이사장을 역임하며 12월 첫째 주 마다 고혈압 주간, 건강수칙을 제정했고 전국으로 개원의 연수 강좌를 시작했다. 또한, 아시아태평양 고혈압학회를 성공적으로 유치하여 회장으로 역임하기도 했다. 고혈압 전문의로서 국민의 30%가 고통을 겪는 고혈압 예방과 치료에 일조를 한 보람 있는 시간이었다. 그 와중에 꾸준히 수필을 썼던 실력으로 2004년 ‘에세이 문학’봄 호에 ‘헌 구두’라는 작품으로 등단하여 2008년 ‘현대수필문학상’을 수상하는 뜻 깊은 시절이었다. 젊은 날의 가장 열정적이었 던 때를 추억하면 항상 한양대학교 병원이 함께 했으므로 이방헌 교수의 한양대학교병원에 대한 애정은 남다를 수 밖에 없다. 환자의 심장을 고치는 것도, 마음을 치유해주는 일. 어느 하나도 놓쳐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이방헌 명예교수의 기본 철학은 ‘사랑’과 ‘관심’이 었다. 사람을 잘 이해하는 것이 치료의 시작이라고 한다. 더욱 힘차게 나아가는 열정 늘 긍정적인 마음 때문일까? 숨 가뿐 시간을 지낸 시간들이 있기 때문에 잠시 쉬어도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 없는데 이방헌 교수의 계획은 더 촘촘해졌다. 우선 현재 수필을 연재하는 월간 잡지에 계속 글을 기고할 것이며 수필가로서 한국문인협회, 에세이문학회, 수석회, 한국의약사평론가협회 회원으로 활발하게 활동할 것이다. ‘고혈압의 이해와 치료, 고혈압 홈 케어, 고혈압 진료 매뉴얼’등 세 권의 고혈압 서적을 편찬했던 것처럼 제자들과 저혈압 저서를 내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또한, 환자의 아픔을 보듬는 의사의 따뜻한 마음처럼 진료에서 느꼈던 것들을 글로 담아낸 수필집을 계획 중이다. 이 모든 것을 문제없이 진행하고자 열심히 운동을 하며 건강관리에 힘쓰고 있다. 내내 사랑을 기본으로 한 열정과 마음을 강조하는 이방헌 교수를 보며 환자와 후배들을 이끄는 거목인 그를 따라 숲을 이룰 따뜻한 감성을 지닌 의사와 병원이 눈앞에 그려지며 그날이 머지않았음을 예감한다. 글/오미연 사진/안호성
2010-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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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틱한 선택의 순간들 뇌혈관 전문의가 되기까지 한양대학교병원 신경외과 이형중 교수
하고 싶은 일은 많았지만 딱히 결과를 정해놓지는 않았다. 속해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다 순간의 선택에 의해 기자가 되고 싶었던 소년은 의대에 진학했다. 그리고 정신과 전문의를 엿보다가 신경외과 전문의가 되었다. 전문의로서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재미있게 영화를 읽어주는 칼럼까지, 어떤 일을 해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이형중 교수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기자를 꿈꾸던 소년 신경외과 의사가 되다 학창시절에 이형중 교수는 늘 음악과 영화와 함께 했다. 수학과 물리를 싫어해서 자연스럽게 문과에 지원하여 막연하게 기자나 외교관을 꿈꾸었다. 그러다 사우디에서 근무를 하시고 귀국하신 아버님이 이과로 갈 것을 권유하셨다. 귀국과 동시에 몸이 편찮으셔서 한양대학교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셨을 때 기술이 있는 전문직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을 하신 것이다. 3형제 중 장남이었던 이형중 교수는 속 깊게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고 한양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음악과 영화는 취미로 즐기자고 정리를 한 후였다. 의과대학을 다니고 있지만 전공과목을 정하기 전까지는 늘 불안했었다. 사람에게 칼을 댄다는 것과 피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괴롭혔고 때문에 해부학 실습 때 남모를 고생이 많았다고 본과 시절을 회상했다. 그런 고민 때문에 처음에는 정신과를 생각했었지만 정신과 실습 중에 ‘나와는 맞지 않는구나.’라고 깨닫게 되면서 진로에 대한 고민은 계속 되었다. 내과 성적이 좋았지만 자신의 자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인턴 시절 신경외과 뇌수술을 지켜보면서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신경외과로 전공을 정한 후 그때부터 뇌혈관 질환에 대한 심도 있는 탐구가 시작되었다. 의사이기 때문에 ‘환자’가 먼저인 이형중 교수는 꼼꼼한 진료로 유명하다. 작은 증상 하나라도 놓칠세라 외래진료를 할 때는 모든 감각을 열어 환자의 말을 경청한다. 앞으로 함께 나아갈 한양대학교병원의 규모와 시설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낀다며 애정이 큰 만큼 한양대학교병원에 대한 일침도 주저하지 않는다. 의사이기 때문에 이형중 교수는 2000년부터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신경외과학교실 교수로 재직하면서 의학 인재를 양성하는데 힘쓰고 있으며, 2004~2005년 미국 피츠버그 의과대학에서 ‘혈관 내 수술’을 연수 받으며 실력을 쌓는데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2007년 제 47회 대한신경외과학회 추계학술대회에서 ‘신경외과 중환자실 환자에서 심폐소생술 후의 생존과 신경학적 예후에 연관되는 요인들’이라는 논문으로 학술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또한 2009년 미국인명정보기관 ABI(American Biographical Institute) 2009~2010판 ‘Great Minds of the 21st Century’에 선정되었다. 이로써 이형중 교수는 미국의 마르퀴즈 후즈후(Marquis Whos Who)와 영국의 국제인명센터(IBC, International Biographical Centre)에 이어 ABI에도 등재되어 중환자 집중치료, 두부외상, 뇌혈관 질환 등에 대한 임상과 실험 연구논문을 통해 그간의 독창적 연구업적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영화 읽어주는 의사 한양대학교의료원의 소식지 《사랑을 실천하는 병원》의 인기 있는 코너 ‘영화 이야기’ 를 담당하고 있는 이형중 교수. 영화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는 솜씨는 학창시절 기자를 꿈 꾸어서 이해가 가지만 칼럼을 읽으면 영화를 보는 수준이 보통이 아니다. “꾸준히 영화를 보아오기는 했어요. 그런데 군 시절 영화를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후임이 들어왔어요. 그 친구와 친해지니 자연스럽게 영화를 공부할 기회가 생긴거죠. 영화 전문 서적도 읽고 예술영화관에 가서 일반 관객이 접하지 않는 장르영화도 많이 보게 되었죠.” 영화를 독학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다 환자 중에 비디오 테이프를 도매하던 분이 치료에 대한 감사의 방법으로 원하는 비디오 100개를 말해달라고 했다. 설마 하고 리스트를 작성했더니 정말 다 구해서 주더라는 이야기를 덧붙이며 웃어 보였다. 그것이 이론적인 공부에 힘을 더해 영화를 보는 눈을 길러주는 계기가 되어 많은 독자들에게 맛깔 나는 영화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게 된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환자를 살리는 일이 우선 많은 사람들이 뇌출혈, 뇌졸중 등 뇌수술이라고 하면 전부 개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한양대학교병원 영상의학과에서는 혈관조영촬영기인 DSA를 도입하여 국소 마취만으로 수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신경외과는 영상의학과와 협조하여 뇌혈관 환자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형중 교수를 만나기 위해 2주를 기다려야만 했다. 언제라도 수술을 필요로 하는 응급 환자가 생길 수 있는 신경외과의 특성 때문이었다. 처음 인터뷰가 잡힌 날, 인터뷰 시간을 바로 코앞에 두고 수술실로 달려갔던 이형중 교수. 뇌혈관 환자의 경우 일 초라도 늦으면 생명이 위험한 상황이 많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늘 응급환자를 위해 준비하고 기다리면서 “수술을 하고 환자를 살리는 일이 나를 서게 하는 힘이 되어준다.”고 말하는 이형중 교수가 있어 한양대학교병원 신경외과가 든든하다. 늘 준비되었기 때문에 순간의 선택에서도 빛을 발휘한 그의 앞날을 응원해본다.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시절부터 인연을 맺고 있는 이형중 교수의 한양대학교병원에 대한 의미는 남다르다. 본인은 다른 곳이 아닌 한양대학교병원의 의사이기 때문에 이곳에 맞는 의사로서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 늘 환자를 돌보고 살리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는 마음 변치 않고 진료를 하겠다며 “진료가 늘 즐겁고 목숨이 위태한 환자를 수술로 회복시켰을 때 존재의 가치를 느낀다.”는 말도 덧붙였다. 글/오미연 사진/김선재 [안녕하세요,선생님] 한양대학교의료원 의료진의 ‘喜怒哀樂’, 의사로 살아가는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2010-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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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에 의한 환자를 위한 의사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 박경남 원장
지난 7월 ‘대한민국 인증대상 의료인증 대상’을 수상한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 박경남(75) 원장의 이력은 화려하다. 외길 인생을 걸어왔음에도 한두 장으로 이력을 요약하기 어려운 것은 단 한 순간의 시간도 헛되이 쓰지 않았다는 증거이며, 생명을 살리는 소명을 부여 받은 이의 각별한 인생철학 때문이다. 여덟 장의 이력서 그리고 한 장 반의 주요경력 ‘의사’라는 외길 인생을 걸어왔을 뿐인데 지나온 삶을 이력서로 기록하니 무려 여덟 장에 이른다. 그것을 압축하고 또 압축하니 한 장 반의 분량이 ‘주요경력’ 으로 재정리되었다. 어느 이력에서는 가슴이 뭉클하고, 또 어느 이력에서는 말로 설명하기 쉽지 않은 묘한 울림이 있다. 수십 년을 지켜온 아침 7시 출근, 저녁 9시 퇴근. 이렇듯 대부분의 시간을 진료실에서 지냈음에도 환자들의 숫자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던 시절이 요즘 들어 부쩍 생생하게 떠오르곤 한다. 그때 박경남 원장은 퇴근하는 동료 의사들의 뒷모습을 매일 2층에서 바라보았고, 후배들을 위해 강단에도 섰으며, 한 사람의 생명을 더 살리기 위해 공부와 연구를 끊임없이 했었다. 그리고 그 뒷심이 되어 준 것은 ‘조금의 헛된 시간도 허락치 않는다’는 강한 의지였다. 한 길을 걸어온 사람의 이력이 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972년에서 2001년까지, 한양대학교병원에서의 30여 년 “의사로 막 출발했을 때 내가 크게 놀란 것이 두 가지였어요. 우리나라에 위장병 환자가 너무도 많다는 것과 내시경 연구가 매우 뒤처져 있다는 것이었어요. 일본, 미국 등에서 열린 소화기 관련 학회를 두루 다니면서 너무도 절실히 깨달았지요.”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군과 기타 다른 병원에서 경험을 쌓은 박경남 원장은 한양대학교병원 시절을 각별하게 여긴다. 그 곳에서 내시경의 권위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내시경 하나로 많은 위장병 환자들을 진료했고, 위암 직전 혹은 위암임을 잡아내어 제 2의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도왔다. 물론 게 중에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달리한 이들도 있다.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안겨 준 그들을 생각하면 크게 기뻐할 수도 또 크게 슬퍼할 수도 없는 애매한 감정의 경계에 놓인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지금까지 자신을 낮추고 열심히 사는 데 소홀하지 않은 박경남 원장이 가장 ‘환자에 의한 환자를 위한 의사’가 된 것은 1972년에서 2001년까지다. 그때가 바로 한양대학교병원에서 쉴 새 없이 환자를 돌보던 시절로 이력서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니 당연히 한양대학교병원에서의 30여 년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활동적인 시기로 기억될 수밖에 없다. 대화를 통해 세심한 진료를 하는 의사 한양대학교병원 소화기내과 개원 멤버로 시작해서 퇴직 순간까지 진료를 했던 박경남원장은 지금 서울 삼성동에 개인병원인 ‘박경남 내과의원’을 열고 오랜 경험과 사랑으로 여전히 의술을 펼치고 있다. 이전보다 더욱 낮아진 자세로 환자를 돌보며, 더 많은 시간을 환자들에게 할애한다. 요즘 박경남 원장의 진료 시간은 좀 긴 편이다. 환자와 많은 대화를 나누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환자 한 명 한 명이 더욱 특별하고 귀한 인연으로 여겨진다. 환자들은 그와 같은 박경남 원장을 두고 “참으로 세심하게 진료하는 의사”라고 칭한다. 또한 공부와 연구를 여전히 병행하고 있는 까닭에 나이로 인한 퇴보가 없다. 새롭거나 꼭 배워야 할 것이 있으면 젊은 후배들 틈에 앉아 공부를 하고, 다양한 서적과 경험을 토대로 신개념의 치료 방법을 연구한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 박경남 원장의 말 속에서 우리가 우리 시대에서 원하는 의사의 모습을 재차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분야만 공부하면 안돼요. 진정한 의사는 통찰력 있는 진료를 할 수 있어야 해요. 우리 몸은 하나부터 열까지 연계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젊은 시절 미국 조지 워싱턴의 흔적을 찾아 갔을 때, 그가 말한 그 유명한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이라는 문구 앞에서 결심했었지요. ‘환자에 의한 환자를 위한 의사가 되자’고 말입니다. 글/손미경 자유기고가 사진/안호성 [인생예찬] 한양대학교의료원의 임직원이 만들어가는 ‘의미’있고 ‘흥미로운’ 삶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2010-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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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노년의 선한 의지 곽진영 명예교수
그 자리에 있는 자체만으로 믿음과 신뢰를 주는 것들이 있다. 세월을 가늠할 수 없는 대자연이 그러하고, 순리에 따라 성실하게 삶을 살아낸 앞선 사람들이 그러하며, 능력과 관용과 지혜를 두루 갖춘 아름다운 노년이 그러하다. 흰 머리가 더 이상 존경의 대상이 되지 않는 지금의 사회에서, 그러나 그 말을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아름다운 황혼이 있다. 여전히 젊은 날의 긴장감으로 허리가 꼿꼿한 곽진영 명예교수(71)이다. 곽진영 명예교수(한양대학교 의과대학 외과학교실, 전 한양대학교병원장) 움직이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감사하며 “나는 도전 정신이 무척 강한 사람이에요. 가방 하나만 달랑 챙겨 세계 어디로 떠난다 해도 두려움이 없어요. 30여 년 전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으로 신장이식수술에 관한 공부를 하러 떠날 때도 나 혼자였어요.” 무엇을 하든 주변인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하는 성격 탓에 곽진영 교수는 대부분의 일처리를 혼자 하는 편이다. 공부도 그랬고, 가족들과 동반할 수 있는 기회도 그랬으며, 어려운 문제에 봉착할 때도 그랬다.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 움직이고 생각하고 행동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가능한 과정보다 결과로 얘기하는 편이에요. 그러다 보니 주변에서 그 결과가 있기까지의 과정을 잘 모르지요.” 과정에서의 힘겨움과 고단함은 적당한 긴장과 실패가 없는 결과들을 안겨 주었다. 지금까지의 삶이 그래서 감사하다. 노력한 만큼, 고생한 만큼, 긴장한 만큼 그 끝이 좋았기 때문이다. 어떤 욕심이 있어 홀로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향을 잘 파악해서 능률의 효율을 꾀한 것이므로 후회도 없다. 한양대학교병원과 더불어 해 온 32년 “왜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잖아요.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얘기하자면 몇 권의 책으로도 모자란다고. 한양대학교병원과 함께 해온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나도 그런 생각이 듭디다.” 1972년 7월은 곽진영 교수가 한양대학교병원 전임강사로 부임한 날이다. 당시 의학의 미개척 분야였던 이식학과 혈관학 강의를 맡게 되었는데 스스로 답답한 순간들이 많았다. 앞선 지식과 사례가 전무후무했기 때문이다. 홀로 해외 연수를 떠난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귀국 후 ‘뇌사’와 ‘심장사’를 구분 못하던 1979년 당시 한양대학교병원에 이식팀을 만들어 국내 최초로 뇌사자 신장이식수술을 시행하고, 20년을 싸워 2000년 ‘장기등 이식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었다. 그리고 1991년부터 사랑의 장기기증 운동본부와 협조하여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신장교환이식’의 기록을 남겼고, 빈곤층의 장기를 밀거래하는 부도덕한 행위와도 엄격하게 맞섰다. 이후 곽진영 교수는 한양대학교병원과 함께 하며 의학계에서 굵직한 성과들을 계속해서 이뤄 왔다. “한양대학교병원은 눈길 가는 곳마다 내 추억이 깃들어 있어요. 그래서 어느 것 하나 그냥 지나칠 수 없어요.” 개원 당시 한양대학교병원은 국내에서 가장 시설이 좋은 곳이었다. 그러나 재벌 병원들이 하나 둘 생기면서 ‘열악하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 당시 원장을 맡게 된 곽진영 교수의 머릿속은 한 순간도 쉬지를 못했다. 뒤처진 모든 시설에 대대적인 개보수를 계획하여 서관을 건립하고, 외래에 휴식 공간과 에스컬레이트가 설치되었고, 병원과 의과대학 건물 사이에 학내 최초로 구름다리가 생겼다. 또한, 동문과 이웃 개원의들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뉴스레터도 만들어 배포하였다. 아름다운 노년 일흔의 나이는 굴곡진 역사를 살아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나이에 이르면 대부분 지나간 날에만 마음 주며 살아가지만, 곽진영 교수는 새로운 에너지를 생성시키며 여전히 평생 해 온 일들을 지속해 나가고 있다. 스스로 자꾸만 눕고 싶어지는 나이라고 하면서도 생각과 행동은 늘 살아있다. 아직 청년의 느낌이 남아있는 꼿꼿한 허리가 그것을 말해 준다. “내 종교가 가톨릭이에요. 은퇴 후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요. 무슨 일인지는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허허허.” 은퇴 후 계획서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좋은 일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좋은 일일수록 말을 아껴야 하니 더 이상 묻지 말라는 곽진영 교수이다. 온화한 성품과 타인에 대한 배려로 평생 적을 두지 않은 탓에 두루두루 평안한 이 노년의 이즈음이 아름다운 이유다. 도전 정신이 강했던 곽진영 교수는 30년 전 홀로 먼 타국으로 신장이식수술에 관한 공부를 위해 떠났다. 그리고 끊임없는 그의 노력으로 우리나라 신장이식에 대한 인식과 기술은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글/손미경 자유기고가 사진/안호성 [인생예찬] 한양대학교의료원의 임직원이 만들어가는 ‘의미’있고 ‘흥미로운’ 삶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2010-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