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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된 충격이 남긴 그림자, 펀치드렁크 (만성 외상성 뇌병증)

작성일
2025-12-22

드라마 <굿보이> 속 윤동주를 흔들리게 하는 펀치드렁크

글. 한양대학교병원 신경외과 홍승우 교수

20세기 권투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는 반복된 머리 충격으로 생기는 ‘만성 외상성 뇌병증’을 앓았다고 전해진다. 주먹에 맞아 휘청거리는 모습이 술에 취한 듯해 ‘펀치드렁크’라고 불리는 이 질환은 권투 외에도 많은 운동선수가 증상을 호소한다. 신체적 증상과 정신적 문제가 함께 나타나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지만, 아직 뚜렷한 진단이나 치료 방법이 없어 예방이 가장 중요하다.

JTBC 드라마 <굿보이>는 권투, 사격, 펜싱, 레슬링, 원반던지기 등 메달리스트 출신 운동선수들이 특채로 경찰이 되어 마약 범죄를 추적하는 이야기다. 배우 박보검이 연기한 주인공 ‘윤동주’는 전직 권투선수로, 금지약물 복용을 의심받아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경찰이 된다. 범인을 쫓던 중 쓰러지거나 시야가 흐려지고 코피를 흘리는데, 극 중 MRI 검사에서 뇌 손상 소견이 확인되어 펀치드렁크 증상으로 여겨진다. 펀치드렁크는 권투뿐 아니라 미식축구, 아이스하키처럼 격렬한 분야의 운동선수가 다양하게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신체 기능 장애, 정서 불안, 파킨슨병 등의 후유증을 유발할 수 있어 세심한 유의가 필요한 만성 외상성 뇌병증에 대해 자세히 알아본다.

술에 취한 듯 휘청거린다면?

펀치드렁크(Punch Drunk)는 권투선수가 반복적으로 머리에 타격을 입은 뒤 휘청거리거나 말이 어눌해지는 증상을 술에 취한 모습에 비유한 표현이다. 의학에서는 ‘만성 외상성 뇌병증(Chronic Traumatic Encephalopathy, CTE)’이라고 부르며, 반복적인 뇌 외상에 의해 수년에 걸쳐 진행되는 퇴행성 뇌질환이다. 과거에는 주로 권투에서만 보고되었지만, 최근에는 미식축구, 럭비, 아이스하키 같은 격투적 스포츠 선수, 또는 군 복무 중 폭발 충격에 노출된 군인 등에서도 나타난다고 알려져 있다. 드라마 <굿보이> 속 윤동주 역시 전직 국가대표 권투선수로, 경기 중 누적된 충격으로 인해 시야가 흐려지고 균형을 잃는 장면들이 나온다. 이는 실제 환자가 겪는 펀치드렁크 증상과 유사하다.

반복된 충격이 쌓아 올리는 병

큰 사고만 머리에 충격을 가하는 것이 아니다. 비교적 가벼운 뇌진탕이나, 증상이 바로 나타나지 않는 작은 타격이 반복될 경우에도 뇌세포에 손상이 누적될 수 있다. 이러한 충격은 신경세포를 손상시키고, 뇌 안에 ‘타우(tau) 단백질’이라는 비정상 단백질을 축적시킨다. 타우 단백질이 뇌에 쌓이면 신경세포 사이의 연결이 끊어지고 점차 뇌 기능이 저하된다. 초기에는 눈에 띄지 않지만 수년, 수십 년에 걸쳐 서서히 증상이 진행되는 게 특징이다.

치매와 닮은 증상이 주는 경고

펀치드렁크의 주요 증상은 크게 인지 기능 저하, 성격 및 감정 변화, 운동 증상으로 나뉜다. 먼저, 기억력이 떨어지고 집중이 어려우며, 판단력이 흐려지는 등 치매와 유사한 인지 증상이 서서히 나타난다. 성격이 예민해지고 충동적으로 변하거나, 우울감과 불안이 심해지는 등 정신과적 문제가 동반되기도 한다. 실제로 운동선수들이 은퇴 후 폭력적인 행동이나 충동 조절 문제로 사회적 어려움을 겪는 사례가 보고되기도 했다. 더 진행되면 손 떨림, 말이 어눌해짐, 보행 장애처럼 파킨슨병과 비슷한 운동 증상이 나타나기도 하며, 일부에서는 시야 흐림이나 어지럼증 같은 감각 장애도 동반된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겪는 시력 저하, 균형 장애, 두통 같은 증상은 이러한 임상 양상과 일치한다.

확인할 수 없는 뇌 속 단서

현재 펀치드렁크는 생전에 확실한 진단이 불가능하다. 때문에 환자가 운동선수였는지, 군 복무 중 반복적 외상에 노출되었는지 같은 병력 확인이 매우 중요하다. 여기에 기억력 저하, 성격 변화, 운동 증상 문제 등이 나타나면 펀치드렁크일 가능성이 높다고 의심할 수 있다. MRI 같은 영상 검사는 다른 질환을 배제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펀치드렁크만의 특이 소견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PET 검사나 혈액·뇌척수액 검사로 특징적인 단백질 변화를 찾기 위한 시도를 진행 중이지만 아직 연구 단계에 머물러 있다. 결국 확진은 사망 후 뇌 조직 검사를 통해서만 가능한 상황이다.

예방이 최선의 치료

아직 펀치드렁크를 근본적으로 치료하는 방법은 없다. 따라서 증상 완화와 삶의 질 유지에 치료의 초점을 둔다. 기억력 저하에는 인지 재활 훈련, 우울감과 불안에는 약물치료와 상담치료를 병행한다. 손 떨림이나 보행 장애 같은 운동 증상에는 파킨슨병에 사용하는 약물이나 물리·재활치료를 할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방으로, 머리에 반복된 충격을 줄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운동 경기에서는 반드시 보호 장비를 착용하고, 뇌진탕 증상이 나타났을 때는 충분한 회복 기간을 거친 후에 복귀해야 한다. 어린 선수라면 특히 두부 손상에 취약하므로 더욱 주의가 필요하다.

 

 

 

 

 

 

작은 신호를 놓치지 말자

펀치드렁크는 단순히 선수 생활 중에 생기는 일시적인 후유증이 아니라, 치매와 파킨슨병으로 이어질 수 있는 진행성 뇌질환이다. 드라마 <굿보이> 속 주인공처럼 시야가 흐려지고 균형을 잃는 증상은 단순 피로나 스트레스가 아닌, 반복된 뇌 손상으로 인한 심각한 신호일 수 있다. 반복적인 머리 외상 이후 변화가 느껴진다면 반드시 신경과나 신경외과 전문의의 진료를 받아야 하며,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 예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