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대학교병원

한양인의 이야기

한양대학교의료원 임직원이 들려주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통해 삶의 에너지를 전합니다.

목록으로 이동

나는 나를 뛰어 넘는다 - 박훈기 가정의학과 교수, 전재범 류마티스내과 교수

매 순간이 고비다. 길던 짧던, 춥건 덥건 한계는 찾아온다. 왜 달리게 된 건지, 누구로부터 시작된 건지 더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순간 뛰고 있었고, 멈출 수 없었을 뿐이다. 더위가 기승을 부린 지난 7월의 어느 날, 마라톤대회에 참가한 동갑내기 박훈기 교수와 전재범 교수를 만났다. 누가 등 떠민 것도 아닌데 이들은 왜 이토록 ‘달리기’에 ‘매달리는’ 걸까?

다이내믹 한양_박훈기_전재범_001

구름 한 점 없는 날씨, 나무 한 그루 없는 한강. 달리기에는 다소 무시무시한 조건이다. 그러나 여의도한강시민공원은 이른 아침부터 마라톤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들로 북적였다. 한쪽에서 몸을 풀고 있는 한양대학교병원 박훈기 가정의학과 교수와 전재범 류마티스내과 교수. 경기를 앞둔 두 선수의 얼굴에는 긴장감보다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달리고 있다는 박 교수는 오늘 하프코스를, 몇 년 만에 달려본다는 전 교수는 10km에 도전한다. 운동화에 단 칩이 출발점과 도착점에서 정확하게 기록을 측정해줄 것이다. 출발선에 나란하게 선 두 사람. ‘탕’하는 신호음과 함께 수백 명의 러너들은 일제히 온유한 바람을 갈랐다.

멈출 수 없는 유혹, 몰아(沒我)의 경지

전재범 교수가 마라톤을 시작한 것은 1997년 아내와 함께 춘천에 갔을 때였다. 일반인에게 막 문을 연 춘천전국마라톤대회에 심심풀이 삼아 ‘한번 나가볼까?’ 했던 것이 계기. 지금은 잠시 쉬고 있지만, 그 후로 1년에 한두 번씩은 꼬박꼬박 풀 코스를 뛰었고, 하프는 가뿐하게 달릴 정도가 되었다. 개인 최고기록은 첫 풀 코스 완주에서 세운 4시간 34분. 전국 규모의 마라톤경기에 서는 중간 정도에 해당하지만 “연습 없이 이 정도로 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며, “타고난 마라토너”라고 박교수가 거들었다. 수영과 조깅을 즐기던 박훈기 교수는 2003년 동료의 권유로 마라톤대회에 처음 참가했다. 체격이 큰 편인 그는 마라톤에 적합한 체질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매일 쉬지 않고 달리며 총 25번의 풀 코스를 달렸고, 1년에 6~7번의 마라톤대회에 참가할 정도로 마니아가 되었다. 최고기록은 4시간 9분, 풀 코스 완주 세번째 만에 얻은 결과다. 유형은 다르지만 쉬지 않고 달려온 이들이 공히 꼽은 마라톤의 매력은 극한의 한계까지 달릴 때 느끼는 환희의 순간, 그 고양감이다. 전 교수는 “마치 내 자신이 사라지는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몰아(沒我)의 경지.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고 불리는 이것은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고통이 날아가고 구름 위를 떠다니는 듯한 느낌을 말하는데, 일종의 환각증상과도 같다고 알려졌다. 박 교수는 한계치 이상에서 경험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장시간 뛰다 보면 사위가 고요해지고 의식을 명료하게 깨우는 순간이 있어요. 보통은 극한의 고통을 맛본 다음에 옵니다. 그때 비로소 진정한 내 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달까요? 제 경우는 스포츠 의학을 하러 영국에 가느나 마느냐를 두고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을 때, 마라톤대회에 나갔던 경험이 있어요. 아스팔트 열기를 받으며 5시간 10분을 뛰었는데, 그걸 거기서 결정했어요. 꼭 그 생각을 하면서 뛰었던 건 아닌데도 어느 순간 툭툭 곁가지가 쳐지면서 한가지 생각만 남더라고요.”

박 교수는 그 길로 스포츠 의학을 더 공부하기로 결정짓고 영국행을 선택했다. 그는 이제 생각이 복잡할 때나 스트레스가 쌓였을 때 책상에 앉아 고민하는 대신 운동화를 고쳐 신는다. 그렇게 매일 아침 길 위를 달리며 인생의 많은 것을 배웠다.

승자와 패자가 없는 세계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말은 대체로 운동선수들에게 적용하곤하는 말인데, 그 중에서도 마라토너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다. 극한의 한계까지 달리는 이들에게 레이스에서의 승부는 중요하지 않다. 우승을 목표로 뛰는 선수라면 다른 문제겠지만 일반적인 러너에게 누군가를 이기고 지는 일은 큰 문젯거리가 되지 않는다.
“달리기에는 승패가 없습니다. 얼마가 걸리든 완주를 하면 러너들은 모두 승리자죠. 그래서 러너들은 다른 러너를 만나면 서로를 응원해줘요. 박훈기 교수님과 저도 그렇고요. 정말 멋진 스포츠 아닌가요?”

경쟁자는 오직 자기 자신. 멈추고 싶을 때 멈추면 그뿐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를 뛰어넘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린다. 그래서 러너는 자유롭고, 또한 고독하다. ‘인생은 마라톤’이라고 했다. 길고 때로는 고통에 몸부림 치기도 하며 인내한 자들에게만 찾아오는 달콤함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언젠간 끝이 난다는 점이 그러하다. 달리는 쾌감을 알아버린 러너들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조금씩 목표를 높여가는 성취감을, 자아 소멸의 해방감을 맛본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완주에 성공한 이들의 입가에 번지는 하늘보다 맑은 미소에 그만 가슴이 설렌다. 러너스 하이(Runner’s high) 다이내믹 한양_박훈기_전재범_002 미국의 심리학자인 A. J. 맨델이 1979년 발표한 논문에서 처음 사용된 용어이다. 신체 및 정신적인 측면과 관련이 있으며, 주변의 환경 자극이 있는 상태에서 운동을 했을 때 나타나는 신체적인 스트레스로 인해 발생하는 행복감을 말한다. 이때의 느낌은 헤로인이나 모르핀 혹은 마리화나를 투약했을 때와 비슷하고 때로는 성적 절정감인 오르가즘에 비교되기도 한다. 마라톤 선수들은 주로 경기보다 훈련을 할 때, 극한의 고통을 넘어 35km 지점쯤 되면 러너스 하이를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 백아름 / 사진. 한진우, 김성현

2013.08.28

관련의료진
류마티스내과 - 전재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