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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한 소파 대신 사랑의 의자에 앉다. 최일영 명예교수(한양대학교 의과대학 내과학교실)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이들은 한결같이 조용함 속에서 행하며, 진실로 하는 바가 없노라 한다. 최일영 교수 역시 그러하여 각종 매체에서 뵙고자 하는 청을 여러 번 거절해 왔었다. 그러나 수십 년 간 몸담았던 곳으로부터의 간곡한 청을 끝까지 내치지 못한 것은 아주 특별하고 오래된 정 때문이었다. 하여 참으로 고맙고 조심스러운 마주 앉음이었다. image image 2005년 9월은 최일영 교수에게 아주 특별한 숫자로 기억된다. 40여년간 몸담았던 한양대학교병원 혈액종양내과의 문을 마지막으로 나섰고, 5일 후 음성 꽃동네 인곡자애병원 내과의 문을 처음 열고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해 최일영 교수의 나이 66세. 안락한 소파 대신 사랑의 의자에 앉은 날, 함께 한 것은 꽃동네를 둘러싼 자연과 아프고 병든 2천여 명의 이웃들이었다. “이렇게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와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꽃동네에서의 세월은 참으로 빠르게 흘러갔다. 그리고 그 세월 속에는 진료를 거쳐 간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점점이 박혀 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생인데, 온 몸으로 품어 주고픈 이웃들의 삶의 풍경은 왜 그리도 구구절절하고 애달픈지 늘 마음이 쓰이고 또 쓰였다. image“매주 화요일 저녁 꽃동네를 출발한 차가 서울역과 영등포역에서 10여명의 노숙자들을 싣고 옵니다. 그들과의 만남은 깨끗한 목욕과 충분한 잠으로 몸과 마음을 녹인 뒤인 이튿날 이뤄지는데, 진료 중 각자 지닌 사연들을 풀어 놓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잠깐의 진료와 그들의 경험을 함께 나누는 일 뿐입니다.” 그 중에는 현실을 벗어난 말로 뜨악하게 하는 이들도 더러 있다. 한 번은 정신분열증 증세를 보이던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며“제가 이번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아시지요?” 하기에 진심으로 “그래요, 잘 했습니다.” 칭찬하니 선한 눈빛이 더 고와짐이 느껴졌다. 다르다 여기지 않고, 비교하지 않으며, 낮은곳에서 낮은 시선으로 사람들을 품으니 저절로 같은 눈높이가 됨이었다. “매주 화요일에는 또 청주성심노인요양원을 직접 방문해서 노인분들을 진료하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할머니 한 분이 계십니다. 90세가 훨씬 넘으셨고, 치매도 있었지만 어찌나 유머감각이 좋으신지 병실을 늘 즐겁게 해주셨습니다. 덕분에 최고의 인기를 누리셨지요.” 사람들은 자신들의 세상과 그들의 세상을 크게 구분 짓지만, 최일영 교수는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를 안다. 그때마다 크다 작다, 좁다 깊다, 짧다 길다 비교하지 않으면 비극은 시작되지 않으리라는 동서양의 깨달음과 마주한다. “얼마 전 대지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이티에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물속의 돌은 햇볕에 쪼이는 돌의 고통을 모른다’고 말입니다.” 일요일 늦은 저녁 혹은 월요일 이른 새벽, 최일영 교수는 햇볕에 쪼이는 돌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나누고자 다시 꽃동네로 향한다. 그리고 대학병원에 몸담고 있던 시절 불리던 ‘교수’라는 칭호를 벗어버리고 꽃동네 ‘내과의사’라는 낮은 이름으로 간호사도 없는 쪽 방만한 진료실의 문을 연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안락한 소파 대신 선택한 사랑의 의자에서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사연과 아픔과 즐거움을 나눌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가능한 그 시간이 길었으면 좋겠다.

글/손미경 자유기고가 사진/김선재

[인생예찬] 한양대학교의료원의 임직원이 만들어가는 ‘의미’있고 ‘흥미로운’ 삶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2010.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