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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화 작품에 묻어난 전신경화증의 흔적 파울 클레와 전신경화증

매년 6월 29일은 세계 경피증의 날(World Scleroderma Day)이다. 동시에 전신경화증을 앓던 화가, 파울 클레가 사망한 날이기도 하다. 현재까지도 정확한 원인과 치료법을 알 수 없는 질환인 전신경화증을 앓으면서도 폭넓은 예술세계를 이어간 그의 이야기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세네치오, 1922 (Paul Klee)

예술적 열망을 꺾지 못한 전신경화증

파울 클레(1879~1940)는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와 함께 20세기를 빛낸 화가다.

그는 평생 약 10,0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는데 특히 1936년 57세의 나이로 전신경화증 진단을 받고 전신이 해체되는 고통 속에서도 1940년 사망에 이르기까지 약 2,5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파울 클레의 초기작인 1922년의 작품을 보면 밝은 색상을 사용하여 즐거운 분위기를 반영한 화풍이란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전신경화증이 발병하고서는 굵직하면서도 단순하며 강한 터치, 삼베나 신문지와 같은 거친 물질들을 사용해 그림을 그렸다. 단순하고 두꺼운 검정 크레용과 같은 선, 심볼, 칙칙한 색감, 그리고 고통, 죽음, 전쟁 등을 반영하는 타이틀이 특징이었다.

1933년 그는 전신경화증의 초기 증상으로 볼 수 있는 손발이 차가워지는 레이노 현상의 존재를 암시하였고, 1935년에는 피로와 같은 비특이적인 증상에 불만을 표했다고 한다. 결국 1936년 전신경화증 진단을 받았고, 단 25점의 작품을 창작할 수 있었다. 질환의 점진적 악화에도 불구하고 1939년에는 1,253점의 작품을 제작하여 예술적 기세를 되찾은 듯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의 그림에는 힘겨운 투병 생활을 반영하듯 이전과 달리 주로 두려움, 고통, 죽음이 다뤄지고 있다.

이듬해 호흡곤란이 악화하여 병원에 입원한 파울 클레. 마침내 1940년 6월 29일 급성 심부전으로 사망하고 만다. 사망 4개월 전에 촬영된 클레의 사진에는 긴장된 피부, 주름에 둘러싸인 입술을 가진 무미건조함이 얼굴에 서려 있다. 그는 자신의 얼굴에서 일어나는 심오한 변화를 짐작하며 완전히 변형된 사진과 같은 자신의 얼굴을 그림으로 남겼다.

1940년 초 클레의 후기 작품으로 꼽히는 <Death and Fire>에는 그의 심정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흰색 두개골이 중심에 있으며, 그의 입과 눈은 죽음을 뜻하는 독일어 T, o, d로 형성되어 있다. 그림의 왼쪽 상단에는 죽음의 손에 쉬고 있는 태양이 붉은 들판 가운데 어슴푸레 보인다. 클레는 아마도 이 그림에서 묘사되는 최소한의 인간에서 자신을 보았고, 이것은 경피증이라는 병이 개인적인 특징을 모두 제거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Death and Fire, 1940 (Paul Klee) 성과 태양, 1928 (Paul Klee)

명확한 원인과 근본적 치료법 필요

전신경화증은 류마티스질환 중에서도 드문 질환에 속한다. 대개 처음에는 손이나 발이 추위에 노출되었을 때나 감정적 스트레스가 심할 때 손과 발끝의 색이 하얗게 또는 파랗게 변하는 레이노 현상(Raynaud’s phenomenon)이 발생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손과 발의 피부가 두꺼워지고 가죽처럼 단단해지는 경피증(scleroderma)도 동반된다.

전신경화증(systemic sclerosis)은 크게 광범위형과 제한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광범위형에서는 피부침범이 손과 발을 넘어 가슴과 배, 몸통까지 침범할 수 있으며, 제한형인 경우 주로 팔과 다리에 국한된다. 내부장기도 침범할 수 있는데 폐를 침범하는 간질성 폐질환과 폐순환의 압력이 증가하는 폐동맥고혈압이 발생하여 숨이 찰 수 있고, 위장관을 침범하면 위식도역류증상, 소화불량, 그리고 장내세균 과증식 등이 발생하기도 한다. 아직까지 전신경화증의 원인을 알 수 없으며 근본적인 치료법이 없다는 것은 안타까울 따름이다.

스위스에서 태어난 독일인 화가인 파울 클레(Paul Klee)의 편지와 일생, 그리고 작품을 통해 전신경화증 환자들이 느낄 심리적 고통과 공포를 조금은 들여다볼 수 있었다. 파울 클레가 사망한 6월 29일은 세계 경피증의 날(World Scleroderma Day)이다. 사람들에게 전신경화증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환자들의 용감성을 인정하고 좀 더 나은 치료를 요구하는 날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대한류마티스학회 산하에 경피증연구회가 조직되어 활동을 시작하였으므로 세계 경피증의 날에 동참할 기회가 생길 것으로 생각한다.

전신경화증의 새로운 치료약물에 대해 들려오는 최근 소식이 전신경화증 환자들이 온몸과 마음으로 느꼈을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해결해줄 것으로 기대해 본다.

참고문헌

  • Endure!: how Paul Klee’s illness influenced his art. Wolf G. Lancet. 1999;353:1516-8.
  • Art and rheumatology: the artist and the rheumatologist’s perspective. Hinojosa-Azaola A, Alcocer-Varela J. Rheumatology (Oxford). 2014;53:1725-31.
  • http://worldsclerodermaday.org/

2018.05.08

관련의료진
류마티스내과 - 전재범
태그

#레이노병(레이노 현상) , #경피증 , #전신경화증 , #면역 질환 , #류마티스